들어가며
올해들어 부쩍 블로그를 쓰는 비중이 줄었다.
일이 바쁘다는 핑계를 댈수도 있지만 진짜 이유는 정보를 찾고 글을 쓰는 재미가 없졌다고 할까
자료조사 부터 글까지 딸깍으로 끝나는 대-AI 시대에 일종의 현타가 왔다. 뉴스레터로 오늘 글이나 서핑하다 찾는 글들에서 AI 특유의 단어와 말투, 그럴듯하고 멋져 보이는 문장들이 이어진 걸 보면 생각보다 흉내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어 거부감이 생겼다. 이런 현상이 딱히 나쁘다고는 생각안한다. 정보를 얻는 방법이 너무 쉬워졌고 그걸 이용하는 건 사람 마음이니. 그리고 이게 뉴노멀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영어 원문 글을 AI를 통해 번역해서 올리는건 어떨까' 아니면 '내가 정말 궁금한 부분을 자료 조사부터 체계적인 스킬을 만들어서 나한테 특정 지식을 설명해주는 느낌으로 아티클을 올릴까' 등등의 고민을 하는 중이다.
확실한건 이 글 마저 클로드한테 시키는 끔찍한 짓은 안 할거다
인문학
위와 연관되는 이야기같은데, 부쩍 인문학에 관심이 가고 있다.
LLM 프롬프트를 쓴다는 건 결국 글쓰기라서, 내 생각을 언어로 정확히 옮기는 능력이 곧 결과물의 퀄리티로 이어진다. '판단력, 취향, 단어를 선택하고 질문을 세우는 능력' 이런 걸 훈련하는 전통적인 학문이 인문학이니 자연스럽게 끌리는 듯 하다.
이게 나만 그런 건 아닌가 보다. 이번 서울대 철학과는 경쟁률이 15.44대 1을 찍었다고 한다. "철학과 가면 밥 굶는다"는 말을 듣고 자란 입장에선 꽤 낯선 숫자다; 기사에선 AI 시대에 사고력을 기르는 데 필요하다는 인식과 로스쿨 입학에 유리하다는 점을 이유로 꼽았다. 솔직히 로스쿨 쪽 이유가 더 클 것 같긴 한데, 분위기가 바뀌고 있는 건 맞는 것 같다.
이 얘기를 클로드랑 하다가 이런 답을 받았다.
개발에서 오랫동안 병목은 구현이었어요. 원하는 게 머릿속에 있어도 그걸 코드로 옮기는 데 시간과 실력이 들었죠. AI가 그 병목을 상당 부분 풀어버리면서, 병목이 앞단으로 옮겨갔어요.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지, 이게 정말 좋은 건지, 사용자는 뭘 원하는지, 내가 원하는 걸 어떻게 정확히 말할지.
이건 기술 문제가 아니라 판단과 해석의 문제예요. 사람을 이해하고, 모호한 것을 언어로 붙잡고, 좋고 나쁨을 가리는 일이요. 본인이 의식하든 안 하든, 지금 일에서 가장 필요한 능력이 인문학이 훈련하는 능력 쪽으로 이동한 거라서, 몸이 먼저 그쪽을 찾아가는 걸 수도 있어요.
클로드 이 똑똑한 녀석;
저 답에서 제일 찔렸던 건 병목 얘기다. 요즘 내 하루를 보면 코드 치는 시간보다 뭘 만들지 고민하고, 원하는 걸 설명하고, 나온 결과가 괜찮은지 보는 시간이 훨씬 길다. 개발자보다는 매니저나 편집자 일에 가깝다. 그러다 보니 실력이라는 게 '이게 좋은지 아닌지' 알아보는 눈으로 옮겨가는 느낌인데, 그 눈은 코드를 많이 짠다고 생기지 않는다. 좋은 걸 많이 보고, 왜 좋은지 따져봐야 생긴다.
AI 말투가 싫어진 것도 비슷한 이유 같다. 하루에 AI가 쓴 글을 수천 줄씩 읽다 보니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AI는 모든 걸 정답인 것처럼 완벽하게 말한다. 틀린 말은 없는데 알맹이가 빠진 느낌이다. 뭐가 거슬리는지 딱 짚기는 어려운데, 뭔가 없다;
그게 뭔지 궁금해서 오히려 사람이 쓴 문장을 찾아 읽게 된다. 문법이 좀 어색하고 빙 돌아가더라도 쓴 사람이 보이는 글을 보면 재밌다.
좀 더 불편한 이유도 있다. 몇 년 걸려 익힌 걸 AI가 몇 초 만에 해내는 걸 보면 신기하면서도 허탈하다. '코드 잘 짜는 사람'이 내 정체성에서 꽤 큰 부분이었는데 그게 흔들리니, 그럼 나는 뭘 하는 사람인가 싶다. 기계가 쓴 문장과 내가 쓴 문장이 정말 다른지, 다르다면 어디가 다른지도 궁금해졌다. 검색해서 나올 답은 아니라서 요즘 소설책이나 철학책을 기웃거리는 중이다. 불안해하고만 있느니 한번 제대로 생각해보고 싶다.
좀 계산적으로 보면, 무난하고 매끄러운 글과 코드가 거의 공짜가 되면 반대로 내 경험이나 취향 같은 건 가치가 더 오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사진기가 처음 나왔을 때 화가들도 비슷한 고민을 했을 거다. 똑같이 그리는 건 사진이 더 잘하니 그림은 다른 걸 찾아야 했고, 그 무렵 인상주의 같은 흐름이 나왔다고 한다. 지금 그 비슷한 시기를 지나는 중인 것 같다.
숨 (테드 창)
『당신 인생의 이야기』 이후 17년 만에 나온 소설집이고, 표제작 「숨」을 포함해 중·단편 9편이 들어 있다. 그중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는 인공지능을 몇 년에 걸쳐 키우는 사람들 이야기라서 지금 읽으면 좀 섬뜩할 것 같다. 테드 창은 개발자 출신이라 이야기 구조가 깔끔하다고 한다. 첫 책으로 제일 무난할 듯.클라라와 태양 (가즈오 이시구로)
인간 소녀 조시와 그 곁에 있게 된 인공지능 로봇 클라라의 이야기다. 로봇이 화자라서 기계의 눈으로 사람을 보게 되는데, 그게 오히려 사람이 뭔지 생각하게 만든다고.
내 클로드의 추천 리스트..똑똑한 녀석;